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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사람들 11 필례약수- 마의태자 전설이 슬픈 피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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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강 댓글 0건 조회 195,249회 작성일 18-08-28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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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피래’라고 불렀다. 점봉산이 바라보이는 가리산 기슭에 자리잡은 필례약수. 안내서에는 베틀을 짜는 여인을 닮은 땅의 생김새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니여, 약수 위로 옛날엔 큰 동네가 있었어. 난리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지.” 난리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 살던 곳이라 ‘필예’(必曳)라 부른 것이 피래라는 땅이름의 내력이라는 것이다. 1916년 행정구역 통합으로 귀둔리로 바뀌기 전까지만 해도 마을이름은 피래였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턴가 필례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약수로 세상에 알려진 필례는 한계령 꼭대기에서도 남쪽으로 10여리쯤 떨어진 산속에 있다. <인제군지>는 1930년께 김씨 성을 가진 이가 발견한 약수라고 적고 있지만 약수의 내력은 그보다 더 오래됐다고 한다. 약수 주변의 축대를 조성한 방식이나, 약수가 계곡으로 직접 흘러 들지 않고 땅 속으로 스미도록 만든 배수구 설치 기술 등에 비추어 볼 때 약수를 이용한 것은 수 백년 전부터였다는 것이다.

약수는 주변보다 한계단 쯤 내려선 바위에서 솟아나고 있었다. 약수가 계곡으로 흘러 들지 않고 땅 속으로 쉽게 스며들도록 배수구는 돌 아래로 뚫려 있었다. “건축이나 토목을 하는 교수들이 조사도 여러 번 했어요. 그런데 배수구를 만든 기술이 뛰어나다는 말만 해요. 한번은 뜯어보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어요. 다시 복구할 자신이 없었던 거죠.” 산이 좋아 서울생활을 작파하고 필례산장에 자리잡은 지 3년 됐다는 이철규(33)씨의 말이다. 그 배수구는 어쩌면 옛사람의 호사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중단된 필례온천 개발이야기를 듣노라면 “배수구는 필례계곡의 물고기들이 약수의 강한 탄산성분을 이기지 못할 것을 염려한 때문일 것”이라는 이씨의 이야기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필례온천이 화제를 끌었던 것은 지난 96년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중탄산수인 데다 한창 관광개발에 열을 올리던 때라 인제군에서도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문제는 시욕장을 개설하면서부터 터지기 시작했다. “필례계곡은 1급 청정지역이에요. 산천어를 비롯해 산메기 등 물고기도 많았어요. 그런데 시욕장이 개설되고 온천물이 계곡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물고기가 보이지 않게 됐어요. 계곡 여기저기에 허연 비누 때가 생기기 시작했고요.” 당시 반장 일을 보고 있던 박병호(43)씨의 회상이다. 결국 개발계획 설명회 자리에서 필례계곡 인근의 마을사람들이 개발중단 시위를 하는 등 소란을 겪은 끝에 온천공은 폐쇄되고 계곡은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내린천으로 흘러 드는 필례계곡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듣게 되는 땅이름들 대부분은 전쟁, 군대와 관련이 깊다. ‘피난처’라는 뜻을 가진 필례부터, 군대가 진을 쳤다는 원진개(遠鎭介), 식량을 쌓아둔 곳이라는 군량밭, 군량미를 나르던 소와 말을 먹이던 곳이라는 쇠물안골(牛馬洞)…. 한계령에서 백두대간 점봉산으로 오르는 능선에도 망을 보던 곳이란 뜻의 망대암(望臺岩)이란 이름이 남아 있다. 글자로 남아 있는 기록은 그런 이름들이 임진왜란 때 의병들과 관계있다고 전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름의 내력에는 마의태자의 자취가 배어 있다.

조각난 전설들을 이어보면 마의태자의 금강산행은 좌절한 왕자가 도망가듯 속세를 등진 길이 아니라 재기를 위한 기회의 땅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양양군과 홍천군을 잇는 구룡령 아래에 ‘왕승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 곳곳에 커다란 돌무더기가 남아 있는데, 고경재 양양군 문화원장은 이것이 마의태자의 왕궁터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서당 다닐 적에 훈장님께서 신라이야기를 자주 해줬어요. 점봉산 아래 귀둔리에 신라의 군(郡)이 있었다고요.” 지금은 필례계곡에 사는 귀둔리 토박이 박유봉(58)씨의 말도 마의태자의 전설을 풀어낸다. 전설에 따르면 귀둔리는 왕승골에서 고려군에 밀려난 마의태자가 재기의 기회를 엿보던 곳이다. ‘둔‘이라는 말이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을 이르던 말이니, 신라 복원을 꿈꾸던 이들에게는 귀한(貴) 둔(屯)이었으리라.

신라 유민들은 한강 물줄기를 따라, 혹은 백두대간 능선을 밟아 마의태자가 있는 귀둔리로 모여들었고 더 깊은 산 속 필례 원진개에 진을 치고 고려군과의 일전을 준비했을지도 모른다. 망대암은 이때 보초를 세워두던 곳이고 쇠물안골은 귀둔리에서 군량밭으로 곡식을 나르던 소나 말을 먹이던 곳이라는 것이 필례에서 모아낼 수 있는 전설의 전부였다.

마의태자와 관련된 전설은 인제군 남면 김부리까지 이어진다. 김부(金富)라는 이름도 마의태자를 이르던 김부대왕에서 나온 것일뿐더러 김부대왕각이 있어 마의태자 후손들인 부안 김씨와 통천 김씨가 지난 83년부터 매년 음력 9월9일 마의태자를 추모하는 재를 올린다고 한다. 필례에서도 고려에 쫓긴 마의태자는 가리산을 넘어 한계리로 이어지는 필례령을 넘어 한계산성에 진을 쳤다가 다시 강을 따라 김부리로 갔을지 모를 일이다. 한계산성 어딘가에 있다는 망경대는 경순왕이 고도 경주 쪽을 바라보며 한탄하던 곳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경순왕은 마의태자의 잘못된 기록이리라. 한계리라는 마을이름도 마의태자가 이곳을 지날 때 가을이었는데도 갑자기 날씨가 추워져 마의태자를 떨게 했다는 데서 나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필례에서 토착민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동란이 일어나던 해 공산당이 3·8선 30리까지 사람들을 모두 북쪽으로 이사를 시켰어요. 그때는 전쟁을 준비하는지 몰랐지.” 박유봉씨도 금강산 어귀까지 이사를 갔다가 전쟁중 다시 내려왔다고 했다. 전쟁이 끝난 뒤 새롭게 필례로 찾아들었던 사람들은 근대화의 바람이 불던 60년대를 거쳐 75년 화전민 정리사업으로 대부분 도시로 떠났다. 그 빈자리는 회색 시멘트에 둘러싸인 삶에 지친 이들이 채우고 있다.

69년 필례에 들어와 ‘설락원’이라는 휴양시설을 운영하며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며 사는 황영일(59)씨는 “마음의 고향을 찾는다는 생각으로 필례를 찾으라”고 말한다. 황씨의 젊은 부인 황지호(36)씨는 “자연 앞에서 경건해지는 법을 모른다면 필례를 찾아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는다. 산이 좋아 이곳에 정착한 필례산장 이철규씨는 물이 모자라도 지하수를 파지 않는다 했다. 계곡물을 마시며 살아가야 자연을 훼손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란다. 아직 주민등록을 옮기지 못했다는 ‘초보’ 필례사람 문영이(52)씨 부부는 예쁜 통나무집을 지어놓고 좋은 공기와 맑은 물을 나눌 궁리를 하고 있다.

피난처 필례. 마의태자의 전설은 희미해졌어도 필례는 여전히 전쟁 같은 도시생활에 지친 이들에게는 아직도 피난처였다

출처: http://100mt.tistory.com/entry/백두대간-사람들-10-필례약수-마의태자-전설이-슬픈-피난처 [<한겨레21> 신 백두대간 기행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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