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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사람들 30 문경새재- 더 이상 소잃고 외양간 고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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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강 댓글 0건 조회 61,688회 작성일 18-08-27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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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찾아주지 않는 그믐, 밤하늘은 홍수가 진다. 온 우주의 별들을 모두 모아놓은 듯한 은하수는 토끼가 조각배를 띄우지 못할 정도로 넓고 깊었다. 소금이 익어가는 여름날 염전을 하늘에 옮겨놓는다 해도 그믐날 은하수를 당해낼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그 은하수를 따라 길게 누운 백두대간의 산그림자 속에서 풀벌레와 새들은 천상의 연주를 들려주느라 밤을 잊고 있었다. 이편과 저편을 잇는 일을 새로 뚫린 터널에 내준 이화령 아스팔트에 등을 대고 누워 누린 하룻밤의 호사였다.

호사는 문경새재까지 이어졌다. 고려가 열었다고도 하고 조선시대에 영남대로를 열 때 비로소 고개로서의 구실이 시작됐다고도 하는 문경새재는 이제 아름다운 공원이다. 영남의 선비들이 입신양명의 꿈을 안고 과거를 보기 위해 넘었다는 길을 오르내리는 이들 가운데는 아예 신발을 벗어 든 이들도 드물지 않았다.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덮이지 않은 길은 맨발로 걷는 이들에게 땅의 기운을 전하기에 충분했다. 죽령을 넘으면 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지만, 문경새재를 넘으면 기쁜 소식(聞慶)을 듣게 된다는 당시의 속설은 이제 여행객들의 입담을 더욱 두텁게 하는 요긴한 재료일 뿐이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이미 흘린 물을 되담으려는 노력만큼 헛된 것이지만 새재에서 역사는 ‘만약에’를 달고 다닌다. 임진왜란 당시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왜군을 막기 위해 나섰던 신립 장군은 새재를 포기하고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쳤다가 궤멸함으로써 임진왜란을 질곡으로 몰아넣었다. 새재 길은 문경의 진산 주흘산과 소백산 줄기를 속리산으로 잇는 조령산이 어울려 만들어낸 험준한 협곡 사이로 나 있다. 왜군은 자연 그대로 요새였던 새재에 틀림없이 조선군이 진을 쳤을 것이라 여기고 몇 번이나 파수를 내보냈다가 조선군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노래를 부르며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신립은 과연 왜군이 두려웠을까? 왜군이 두려웠다면 퇴로를 스스로 차단하는 배수진을 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립이 두려워한 것은 왜군이 아니라 무기력한 조정이었을지 모른다. 만약 새재에 진을 쳤다가 왜군에 포위라도 당한다면…. 당시 조정은 새재에서 시간을 번다고 해도 달리 다른 수를 마련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가정이 옳다면 탄금대 배수진은 임진왜란의 승패를 한 번에 결정지으려는 신립의 대도박이었을 것이다. 결국 도박은 실패했다. 신립의 무모한 용맹은 5천년 민족사에 치욕의 역사 한 줄을 더 남겼을 뿐이다.

역사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오늘의 아름다운 공원 새재는 신립의 패배에서 비롯한 것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한번 혼이난 조선은 임진왜란이 끝나기도 전에 성을 쌓고 관문을 만들기 시작했다. 병자호란까지 치르면서 관문은 3곳으로 늘지만 결국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구비야 고개마다 눈물이 난다’라는 <문경아리랑> 노래말을 남겼을 뿐이다. 전쟁에 넋이 나간 제 가족을 버려둔 채 성을 쌓고 관문을 짓는 노역을 담당했을 당시 민중은 이런 노래말에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조정의 무능을 탓했을 것이다.

병자호란을 끝으로 오랫동안 커다란 전쟁이 일어나지 않자 새재는 점차 조정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모양이다. 보부상들이 오가기 시작했고 이들을 상대로 잠자리도 제공하고 먹을거리도 팔던 주막들이 생겨났다. 주막거리가 서자 화전민들도 모여들었다. 괴산쪽 고사리도 이렇게 해서 형성됐다. 신혜원이라는 원이 있었다는 고사리 인근 화천리가 고향인 김동찬(64)씨는 고사리의 마방과 주막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김씨의 기억 속에서 새재는 이렇다 할 농경지가 없었던 고사리 사람들이 콩을 지고 넘어가고 쌀을 이고 돌아오던 고개다. “사변이 나기 전까지만 해도 많이들 다녔어요. 차도 귀하고 이화령은 머니까. 이 길이 충주로 가기 빠르거든.” 콩과 쌀이 물물교환되던 시절까지만 해도 심심찮게 이어지던 보부상들의 발길이 끊긴 것이 한국전쟁이 끝나면서부터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병대를 동원해 이화령을 넓혔고 그 길로 군용차량들과 버스가 다니기 시작한 것이 그때였다.

주막거리 고사리의 명맥을 이은 것은 관광객들이다. 보부상들의 짐을 지고 고개를 넘은 말들의 쉼터였던 마방이 있던 자리엔 ‘마방가든’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주막은 사라졌지만 새재로 오르는 길목에 붙어선 집들에는 어김없이 ‘가든’으로 끝나는 간판이 달려 있다. 밥을 사먹고 잠자리를 구하는 이들이 장사치에서 여행객들로 바뀌고 “서울사람이 땅을 다 차지한” 지금도 고사리는 주수입원을 길손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수옥폭포가 있고 신선봉, 마패봉(마역봉이라고도 한다), 조령산 등의 자연을 찾는 발길은 붐비지는 않았지만 끊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고사리 사람들은 더이상 기대하지 않는다.

조령산휴양림이 들어선 뒤로 민박을 찾던 이들은 휴양림 산막으로 발길을 돌린다. 자가용이 늘면서 식사손님은 더 귀해졌다. “애고, 먼지만 늘었어요. 그래서 상을 다 치웠다니까. 차는 많이 다녀요. 그러면 뭐해 죄다 싸갖고 다니는데.” 10년 넘게 장사를 했다는 아주머니는 하루종일 오가는 자동차들이 만들어내는 먼지를 치우는 것이 일이 된 것이 3년 전부터라고 하소연했다. 문경쪽 새재에서는 들을 수 없는 하소연이었다.

김씨는 이런 하소연을 “충청북도가 도세가 약해서…”라는 말로 이해하고 넘어갔다. 새재를 도립공원으로 지정해 관리해온 경북에 대한 부러움이었다. “경북사람은 생각이 깊고 넓다”라는 칭찬은 ‘자연 그대로’를 내세우는 문경쪽의 공원 개발에 대한 부러움에서 나온 말이었다. 경북과 충북을 가르는 3관문을 중심으로 새재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문경쪽은 전봇대가 없다. 전화와 전깃줄을 모두 땅 밑으로 이은 탓이다. 군데군데 팬 시멘트길과 길 앞에 나선 휴게소가 괴산쪽이라면 고운 마사토를 다져 깐 흙길과 길에서 떨어진 곳에 만든 휴게소가 문경쪽 모습이었다.

문경새재에 사람들의 발길이 늘면서 한때 경북과 충북을 가르는 3관문 앞에는 매표소가 두개였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충북쪽은 새재 길이 휴양림을 지나는 것을 이유로 도 경계인 3관문 앞에 매표소를 설치했다. 새재를 도립공원으로 지정한 경북도 입구인 3관문 앞의 매표소를 계속 유지했다. 사적지 주변 200m까지 관리권을 인정하는 법규가 경북의 무기였다. 결국 계속되는 민원에 손을 든 것은 충북이었다. “전에 새재 관문을 복원할 때 경북에서 3관문은 충북에서 복원하라고 했대요. 그런데 못했지. 고개야 어디 문경만의 고갠가. 문경이 입장료를 독식해도 할말이 없지.”

괴산군도 새재의 충북쪽을 중심으로 개발을 계획하고 일부를 추진하고 있다. 산촌마을과 몽고촌 등을 세우고 수옥폭포 위 저수지 주변의 수영장은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웬만하면 지대상승 등을 기대해 개발을 반길 만도 한데 고사리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탐탁해하지 않았다. 자연에 삽을 들이대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경험한 탓이다. “아유, 그대로가 좋지요. 문경도 그리해서 돈 벌잖아요.” 수옥폭포 위에 저수지를 만든 뒤 폭포에는 청태가 시퍼렇게 끼고 폭포에서는 물 썩는 냄새까지 나고 있다.

새재를 두고 벌어지는 경북과 충북의 미묘한 경쟁은 보존과 개발의 경쟁으로 번지고 있는 듯했다. 고사리 사람들은 이미 그 경쟁의 승자가 누가 될지 알고 있었다. 문경새재는 더이상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출처: http://100mt.tistory.com/entry/백두대간-사람들-29-문경새재-더-이상-소잃고-외양간-고치지-말자?category=223768 [<한겨레21> 신 백두대간 기행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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